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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씁쓸한 단상

from NonFiction 2009/04/02 17:42

가히 열풍이다. 신드롬이라 이를 만도 하다. 김연아가 세계선수권 1위를 한 날의 저녁 아홉 시 MBC 뉴스는 여섯 꼭지, 25분 넘는 시간을 할애해 ‘여왕에 등극한’ 그녀의 경기 모습이며 주변 소식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참 친절한 봉춘 씨. 물론 그랬던 건 다른 방송사들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주관 방송사인 씨방새는 스포츠 뉴스까지 포함해 무려 40여 분을 김연아 뉴스로 전파를 쏘아올렸다. 이런 열광적인 보도는 방송사만이 아니었다. 각종 신문사, 인터넷 포털 등에서도 김연아는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뉴스 소스였고 지금까지도 그 열기는 식지 않는다.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건 아니다. 김연아의 영광을 폄훼하려는 의도를 갖고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김연아의 경기 중 하나를 보며 그녀의 훌륭한 연기에 매료된 한 사람이다. 피겨 스케이팅에 관한한 아예 무식한 눈으로 보아도 나머지 선수들에 비해 월등한 김연아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설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스피드/도약력 등 세부적인 기술이, 표현력/구성력 등 전반적인 연기 능력이 기립박수를 치게 만들 만하다는 데 이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몹시 불편하고 씁쓸해지기도 한다. 숨이 턱 막히게 하는 이 집단적 감응은 도대체 무엇인가. 굳이 ‘집단적 감응’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김연아에게서 비롯된 감동이 개인적 카타르시스 기제를 넘어 그녀와 국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민족―국가적 영광 이데올로기로 너무나 쉽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털 <다음>의 스포츠 게시판에 ‘한국인이라는 게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는 한국계 미국 유학생의 글이 적지 않은 추천을 받고 베스트로 올라 있는 것이나, ‘한민족은 도대체 못 하는 게 뭐냐’는 골자의 글에 달린 무수한 동의성 댓글들은 이 사회의 민중이 얼마나 간단하게 국가―민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동원될 수 있는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승자로서의 관용을 보이는 것도 좋다’는 요지의 경향신문 논설이 온갖 비난으로 난자당하고 있는 현실은 대중 안에 치명적일 만큼 침투해 있는 파시즘의 기운을 느끼게까지 한다. 

이 같은 현상이 비단 한국 사회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김연아의 멘토라는 크리스티 야마구치의 일화는 민족―국가 이데올로기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억압/동원 기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야마구치가 1991년, 1992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하자 일본 언론들은 그녀가 일본계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 이면에는 일본 빙상 연맹과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고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야마구치를 이용한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의 확산/공고화였다. 그러나 일본 언론과 정부의 바람과 달리 야마구치는 자신이 미국인이며 그렇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야마구치는 성조기가 게양되는 순간 시상대에 서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녀 역시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사람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본의 기도는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맥락에 아메리칸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가 있다고 하면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계통의 사람들을 보듬고 응원하는 게 나쁜 일이냐고. 당연히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조금이라도 가깝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건 인지상정이다. 나쁜 건 이러한 순수한 인간의 정서가 민족―국가 이데올로기, 더불어 상업자본주의에 의해 조작/왜곡된다는 사실과 그것을 무수한 개인들이 방조하고 나아가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김연아의 세계선수권 제패에 왜 ‘국위 선양’이라는 말이 따라붙는지, 어째서 이제는 일반 개인들이 먼저 나서 그걸 집단적으로 영광스러워하고 찬미하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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