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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소설, 지구인

from jigooin 2011/05/16 10:49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멀미가 났다. 좌회전, 우회전, 우회전, 좌회전, 한참 직진 후 우회전하다 곧바로 다시 한 번 짧은 우회전. 거기서 방향을 놓쳤다. 눈이 가려진 채 나머지 감각으로만 한 시간 넘도록 움직이는 자동차의 동선을 가늠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눈이 가려지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길치인 나로서는.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급경사를 내려가나 싶더니 이윽고 차가 멈추며 시동이 꺼졌다.

내려.”

내가 왼쪽으로 몸을 움직이자 그가 내 오른팔을 잡아끌며 다시 말했다.

아니, 이쪽.”

두 사람이 내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웠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 엘리베이터 서는 소리. 몇 발자국 걸어가다 섰다, 돌아섰다. 당연히 위로 올라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움직였다. 가벼운 어지럼증이 일었다.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던 두 팔이 기우뚱거리는 내 몸을 가누었다. 운동으로 다져졌을 근육질의 팔뚝들, 하나만으로도 나 같은 약골은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대체 이들의 정체가 뭘까.

나는 그 때 성당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앞서 걷고 있는 핫팬츠 여자의 뒤태를 흘끔거리며 걷고 있는데 내 곁으로 검은 색 승용차가 느리게 지나갔다. 아니다, 지나가려다 멈췄다. 이런 골목으로 저렇게 큰 차를 몰고 들어오면, 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건장한 체구의 남자 하나가 튕겨나오는 거였다. 어어, 할 사이도 없었다. 그 식상한 표현, 비호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동작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는 찰라, 남자의 주먹이 날아와 명치에 꽂혔다. ! 짧고 강한 통증과 함께 숨이 막혔다. 몸이 무너져내렸다. 눈 앞으로 솟아오르던 보도블럭이 쑥 멀어지더니 조금 큰 쿠션을 다루듯, 남자는 나를 집어올려 승용차 뒷자리로 던져넣었다. 거기 앉아 있던 다른 남자가 능숙한 몸놀림으로 패스를 받았다. 밖에 있던 남자가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당신들 누구야!”

소리치는 내 입에 무언가가 날아와 얹혔다. 내 오른편 남자의 왼쪽 팔꿈치였다.

반말 금지.”

그가 나즈막하게 말했다. 조용했지만 위압감 있는 말투, 겁이 났다.

, 누구신데…….”

저한테 이러시는 거에요?라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눈 앞으로 달려드는 팔꿈치가 보였다.

, 금지.”

어흑! 뭉개진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말은 금지여도 울음은 자유인 모양이었다. 팔꿈치 가격 대신 눈에 안대가 씌워졌다. 그 와중에도, 그럴 필요 전혀 없었는데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좌회전, 우회전, 우회전, 좌회전, 한참 직진 후 우회전하다 곧바로 다시 한 번 짧은 우회전. 제길, 그런 식으로 행선을 파악해내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안대가 풀렸다. 어두침침한 실내,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집기며 벽이며 바닥, 천정이 온통 검은 색의 방이었다. 거기 있는 다섯 남자 모두 검은 색 정장 차림이었고 한결같이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는 게 보였다. 주춤, 뒤로 물러나는 나를 두 남자가 붙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내 앞에 다가선 남자가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뭐 땜에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죽일 거면 한 방에 끝내 줘.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들어올린 몽둥이를 천천히 내 정수리에 갖다댔다. 눈을 뜨고 다시 한 번 바라보니 그건 몽둥이가 아니었다. 공항 검색대에서 쓰는 탐지봉처럼 생긴 거였다. 그게 꽤 오랫동안 내 몸 전체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는 동안 여전히 숨 막힐 듯한 불안감 속에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이들이 사채업자가 아닐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사채커녕 카드 현금서비스 한 번 받아 본 일이 없었다. 두번째는 누군가 내게 원한을 품고 그들을 사주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지만, 글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렇게 크게 웬수 질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있다면, ‘MB만쉐라는 닉네임을 가진 녀석과 인터넷 토론장에서 나흘에 걸쳐 싸운 일이다. , 돼지로 시작해 밤길 조심해라, 로 끝을 본 싸움이었다. 설마 그 녀석이?

대단한 걸. 감쪽같아.”

탐지봉을 든 남자가 물러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본부로…….”

다른 남자가 말을 받았다.

아니, 아직은.”

그 때까지 실내 가장 안쪽의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가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일어섰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외국인, 그것도 흑인이었다. 그의 맞은편으로 끌려가 의자에 앉혀졌다. 두 남자가 왼쪽 벽에 붙어 있는 소파에 앉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두 남자 중 하나가 오른편 벽에 팔짱을 끼고 섰다. 나머지 한 남자는 구석에 놓여 있던 기계 쪽으로 걸어가 무언가를 바쁘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매뉴얼이 있음 직한 절도 있는 동작들이었다. 군인? 그들의 정체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보았다. 그제서야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니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고문기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왔나?”

흑인이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가 한국어에 유창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글래스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보는 기분이었다. 가만, 이 남자를 어디서 봤더라.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흑인 특유의 커다란 콧망울은 예사스러웠지만 부드러운 턱선, 얼굴에 비해 좀 크다 싶은 두 귀는 분명히 낯선 게 아니었다.

!

내 입에서 짧은 호흡 같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니 도대체, , 어떻게 저 남자가 여기 있는 거지? 아냐 아냐, , 어째서 내가 저 남자 앞에 잡혀 와 있는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이제서야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군.”

억양은 다소 어긋났지만 발음만은 정확한 한국어였다. 피식, 웃으며 그가 선글래스를 벗었다. 감춰져 있던 눈이 드러나자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머리를 흔들었다.

, 아아. 당신 이름이,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

차 안에서 팔꿈치로 나를 때렸던 남자가 움찔 몸을 움직였다. 흑인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영어에 익숙해서 그런지 반말, 존댓말이 오히려 내겐 생소해. 편한 대로 하게 둬.”

, 하고 팔꿈치가 속기침을 했다. 습새 같으니. 혀라도 낼름 내보여 주고 싶었다.

윌이라고 불러도 돼.”

흑인이 그렇게 말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밝아지며 거기에 또박또박 글자가 하나씩 새겨졌다. 타이핑 효과를 넣은 오프닝 크레딧처럼, W.i.l.l. S.m.i.t.h!

윌 스미스!”

나는 소리쳤다. 유레카를 외칠 때 아르키메데스의 목소리가 그런 옥타브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헐리우드 특급 스타인 그가 왜 내 앞에 앉아 있는 거지? 더구나 이런 기괴한 곳에, 이렇게 한없이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 아래.

언제 왔나?”

윌이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당신은 언제 왔죠?”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했다. 그럴 수밖에, 나는 한국어에만 익숙했으니.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다시 선글래스를 낀 윌은 딱딱한 말투를 살려 빠르게 말했다. 내 속에 살짝 생겨나고 있던 그에 대한 친근감이 휘발하는 동시에 말랑말랑하게 부풀어오르던 환상이 쨍그랑 깨지며 어두침침하고 거무스름한 현실이 눈 앞에 바짝 당겨져 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내 앞에 놓인 현실이라니.

언제 왔느냐는 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꼭 <맨 인 블랙>의 제이 같군요. 지금 3탄을 찍고 있는 겁니까? 케이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저 남자 팔꿈치에 얻어맞은 주둥이가 이렇게 아픈 걸 보니 영화도, 그렇다고 몰카도 아니군요. 이게 대체 뭡니까?”

의외로 침착하게 나는 말했다. 따그르르르 딱. 윌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리듬감 있게 두들겼다.

“<맨 인 블랙>이 말짱 허구라고 생각하나? 그 영화는, 약간의 과장된 요소가 있긴 하지만, 사실이야. 헐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에 그런 영화가 몇 있지. 가령, <매트릭스> 같은 거. 영화화 함으로써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을 허구로 인식하게 만드는 거야. 일종의 프레임 효과지. 영화는 허구다, 라는 일반인들의 관념틀을 이용하는 거라구.”

뭘 그렇게 장황하게 지껄이나, 는 표정으로 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야, 내가 외계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엠아이비는 실재한다. 내가 특수요원 제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물론 영화배우 윌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린 두 달 전부터 너를 줄곧 관찰해 오고 있었어. 넌 현재까지 알려진 외계인들과 전혀 다른 형태의 외계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구에 언제 왔나, 어디서?”

황당했다. 손을 들어올려 입술 언저리를 지긋이 눌러 보았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꿈이면 좋으련만. 콧망울 바로 위까지 선글래스를 끌어내린 윌이 까만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진지한 그들에게 더이상 빈정대거나 이죽거리는 말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다. 헐리우드 스타 윌 스미스가 넋 빠졌다고, 심심해 죽을 것 같아서, 뭔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해서 이런 짓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증거 있어요?”

내가 말해 놓고도 우스웠다. 그건 좀도둑들, 양아치들이 알량한 혐의를 부인할 때나 쓰는 말이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너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육체를 지니고 있어. 지금까지는 거의가 분리형이었고 간혹 일체형인 경우에도 전부 스캔에 걸렸지. 결정적으로 디엔에이 구조까지 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넌 스캔도 통과했단 말야. 그 때문에 내가 직접 온 거고.”

말 좀 짧게 하면 덧나냐, 생각했다. 영화 속 수다스러운 캐릭터가 실제 모습이구나,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탐지봉으로 내 몸 전체를 훑은 게 스캔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니들이 내놓을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거잖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날 이 꼴로 만든 거란 말야?”

존댓말은 개뿔, 내가 왜 이 꼴을 당하면서도 존댓말을 써야 하나 싶었다. 반말을 구사하기로 작정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그가 나보다 연상도 아닐 터였다. 하여간 이 거지발싸개 같은 나이 문화라니, 거기까지 번져나가던 생각을 후딱 접어들였다.

노노.”

말하며 윌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종이뭉치를 가지고 와 테이블에 내려놨다.

결정적인 게 하나 있지. 덕분에 우리가 널 발견할 수 있었고.”

나는 윌의 얼굴과 테이블에 놓인 종이뭉치를 번갈아보았다.

뭔지 알겠어? 너의 뇌파 그래프다. 인간, 지구인의 뇌파는 다섯 가지야. 알파, 베타, 감마, 세타, 델타. 그런데 넌 다른 뇌파 하나가 더 있어. 외계인의 전형적인 특징이지. 그래서 우린 주로 뇌파 추적장치를 이용해 외계인을 찾아내는데, 두 달 전, 네가 포착된 거야.”

두개골 속의 뇌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좌뇌는 시계 방향, 우뇌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정말 돌겠네. 그래서 어쩌라고? 내 뇌파가 여섯 개 아니라 예순 개면 또 어때? 이까짓 종이뭉치로 날 외계인으로 단정한다는 게 말이 돼?”

어쨌든, 우린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이건 지구인의 뇌파가 아니야, 결코.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지구인이라는 걸 우리에게 증명해야만 하지.”

뭐 이런 개떡 같은 경우가 있나. 애먼 사람 잡아다 놓고 결백을 증명하라니.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증명하느냐 말야! 니들이라면 할 수 있겠니? 한 번 해 봐. 니들이 외계인이 아니라는 걸, 지구인이라는 걸 증명해 보라구! 니들이야 말로 외계인 아냐?”

어깨를 으쓱 하고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윌이 픽, 웃었다. 나머지 남자들이 비슷한 소리로 따라 웃었다.

니들도 웃기지? 나도 웃겨 죽겠거든.”

한 호흡 멈췄다가,

어려서부터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면 돼?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동창들을 증인으로 불러올까?”

덧붙였다.

그런 건 증거가 될 수 없어. 충분히 조작 가능하니까.”

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태어나자 마자 찍은 발바닥 도장은 되니? 아니면…….”

말하다가, 머릿속에 반짝 켜지는 게 있었다. 탯줄. 그래, 신생아 때 묶은 배꼽자리에서 떨어진 탯줄이 지금도 어머니 장롱 서랍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탯줄이 있다. 니들 잘난 과학으로 분석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 그것도 조작 가능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내려치고 등받이 깊이 몸을 뉘었다. 그러다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윌을 노려봤다.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밀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야, 니들이 뭔데? 왜 외계인을 잡으러 다니는 건데? 니들한테 누가 그럴 권리를 줬어? 더러운 양키놈들, 지구인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제 외계인까지 색출하고 다니니? 그리고, 외계인이 어딨어, ? 지구에 살면 다 지구인이지 외계인이라는 건 또 뭐야? 누가 그걸 나누는데? 왜 니들 꼴린 대로 나누고 지랄인데, 시팔!”

팔꿈치 사내가 튀어 오는 게 보였다. 더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벌떡 일어났다. 습새, 쥐어터지더라도 내가 네놈 귀 하나쯤은 물어뜯어 버리고 말 거야,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때마침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었다. 팔꿈치가 멈춰섰고 윌이 핸드폰을 받았다. 영어로 통화하는 바람에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슬쩍 굳어지는 그의 표정에서 좋지 않은 얘기가 오가는 느낌은 들었다. 핸드폰을 닫으며 윌이 팔꿈치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팔꿈치의 얼굴도 굳어지는 게 보였다. 팔꿈치가 나머지 남자들을 불러모았다.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의 얼굴도 굳어졌다.

.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서는 소리가 나더니 불빛이 환해지다 이내 사라졌다. 돌아보니 검은 정장에 짙은 선글래스를 걸친 세 남자가 눈가리개를 한 빈약한 몸집의 남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서 있었다. 저 외계인 누명을 쓴 가엾은 남자는 도대체 누굴까. 멀리서 봐도 입 언저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부은 것 같았다.

개새, 말 졸라 많아.”

한 남자가 방 가운데로 걸어오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백인이었다. 그의 한국어도 유창한 듯했는데 윌의 것보다 무척 거칠다는 게 이색적이었다. ,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토미 리 존스였다. 코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특유의 팔자 주름이 그라는 걸 분명히 해 주었다. 이런, 거기 계속 있으면 프레데터를 헤드락으로 조르며 나타나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에이리언 시체를 질질 끌고 오는 시고니 위버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남자들에게 토미가 손짓했다. 두 남자가 달달달 떨며 서 있던 남자를 방 가운데로 끌고 와 눈가리개를 풀었다. 가만 보니 입술 주변이 나보다 대여섯 배는 더 부어올라 있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러게, 나처럼 두 대 쥐어터진 타이밍에서 울어 버리지, 거참, 바락바락 대들었나 보군. 토미는 윌 옆 의자에 앉았고 주둥이 부은 남자는 토미의 맞은편, 내 옆 의자에 주저앉혀졌다. 어라, 그런데, 저 사람, 자세히 보니 우리 앞집에 사는 가영이네 아빠잖아! 순간적으로 몹시 놀랐지만 그 자리에서 무얼 어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얼른 내보내.”

나를 흘끔 올려다본 토미가 윌에게 작게 말했다. 윌이 팔꿈치에게 턱짓을 했다. 팔꿈치와 다른 남자 하나가 내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끌었다.

착오가 있었다. 네가 아니라 저 남자였다는군. 여길 나서면 다 잊게 될 테니 사과 같은 건 생략하겠다. 잘 가라.”

뒤를 따라오며 윌이 책 읽듯 말했다. 그 때, 내 귀에 또렷하게 날아와 박히는 말이 있었다. 그건 토미의 입에서 나온 말 중 한 토막이었다.

어이, 엠비만쉐. 이명박이랑 같은 별에서 도망온 설치류 외계인 맞지? 기계 쓰기 전에 순순히 부세요. 저거 조낸 아프거덩.”

가벼운 현기증이 종아리를 휘감았다.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던 두 팔이 내려앉으려는 내 몸을 붙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마자 승용차에 실렸다. 다시 눈가리개가 씌워졌다. 우회전, 우회전, 우회전……. 방향을 잃었다. 눈가리개가 풀렸을 때, 그 곳이 내가 잡혀 갔던 성당 모퉁이라는 걸 알았다. 새벽일까, 거리는 어두워져 있었다.

, 이걸 똑바로 쳐다봐.”

차에서 내리자 팔꿈치가 차창을 내리고 자그마한 막대기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뉴럴라이저, 기억제거장치였다. , 빨간 불빛이 번쩍였다. 차창이 올라가고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꽁무니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근데 저 등신들, 뉴럴라이저가 있는데 뭐 하러 눈가리개는 하고 지랄이야. 터진 입술이 쓰려왔다.

모퉁이를 돌다 방향을 바꾸었다. 성당 본관으로 향했다. 예배당 안의 고해성사실로 들어가 한쪽 구두를 벗어 들고 뒷굽을 30도 가량 틀었다. 그리고 간단한 메시지를 전송했다. 움까리쑤눈, 흐기안투바톨리답쿰. 한국어로 번역하면 대략 이런 거였다.

잡힐 뻔 했음, 당분간 연락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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