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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 지향

from NonFiction 2009/01/29 04:12

몹시 쑥스러운 일이지만,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려는 이유는 지난 날을 진솔하게 되돌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적어도 올해에 한해서나마 진중한 전망을 해 보려는 의도에서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든 단점을 열기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용기를 아직은 구축하지 못 했을 뿐더러, 적어도 쇼당[각주:1] 부를 패 두어 장쯤은 쥐고 있어야 먼지 같은 목숨이라도 연명할 수 있음을 학습해 둔 용렬한 의식 덕분/탓이다. 

내 가장 몹쓸 면 중 하나는 알고 있는 정도에 비해 드러내려는 욕구가 비상적으로 크다는 것이다. 매명욕 때문일 수도 있겠고 현학욕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름을 파는 일이든 학식을 드날리는 일이든 그에 걸맞는 식견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부끄러울 까닭이 있을 리 없지만, 지금까지 내가 흘리고 다닌 글이며 말을 되새겨 보면 함량 미달의 것들이 너무 많아 혼자 있음에도 뜨거워지는 낯을 견딜 수 없을 정도다.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된 글/말들은 물론이고 논거 빈약한 글/말들, 오류투성이의 글/말들, 감정 여과에 실패한 글/말들이 많다는 건 결국 제대로 알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아프지만 겸허히 새삼 깨닫는다. 

욕심껏 사 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많다는 사실도 식자연하려는 싸구려 현시욕의 증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작년에 산 책이 얼추 백여 권쯤 되는데 그 중 읽은 건 채 서른 권도 안 된다. 재작년 이전에 사 두고 읽지 않은 책까지 합하면 못 돼도 7할 이상은 여전히 출고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지 싶다. 시간이 날 때면 뻘짓도 다채롭게 하느라 기껏 화장실에 앉았을 때나 지하철 타고 오갈 때만 건성으로 읽고 마는 지경이니 거슬러 생각하면 그 책들을 짓기 위해 고생하였을 분들께도 무척 죄송할 따름이고, 더불어 배움보다 미상불 배운 체 하려는 데 허욕을 두었음 직한 나 자신이 못내 수치스러울 뿐이다. 

가끔 글 잘 쓴다는 말을 들을 때, 말 그대로 쪽팔려서 뭐라 대꾸하는 게 현명한 처신일까 고민하곤 한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두 가지 요소, 형식적 틀과 실질적 내용이 적절하게 어우러졌음을 의미하는데, 내 경우에는 암만 생각해 봐도 앞엣 건 그렇다 쳐도 뒤엣 건 영 아뇰시다라서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잘 쓴 글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대개 그럴 만하게 쓸 줄 아는 못된 '스킬'을 터득해 버린 개인적 비극 탓이다. 포장 잘 하는 기술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게 사람들 현혹하는 데 유독 빛을 발하는 거라면 독이다. 그럴 양이면 차라리 해독이 쉽지 않은 맹독인 편이 좋으련만, 이건 뭐 논리를 갖추고 따져드는 말 몇 마디로도 간단히 바스라져 버릴 정도니. 이 또한 배움에 천착하지 않아 앎이 깊지 못한 탓.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쓰고 말하는 일보다 읽고 배우는 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면서도 여태 실천하지 못한 이유 중 가장 치명적인 건 게으름이다. 그 게으름은 얄팍한 지식만으로도 웬만한 데서는 통하더라는, 돼먹지 못하게 배운 요령 때문이기도 한데 그 요령은 또한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기만적 매명욕/현학욕/현시욕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읽고 배우는 일이 나를 함부로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기실 나를 견고하게 다지기 위함임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 온 몽매까지 더해지고 보면. 

새해 첫 달이 사흘 남은 시점에 이런 글로 올 한 해나마 지향하는 바를 적시하는 이유는 하나다. 글쓰기보다 책읽기를, 말하기보다 깊은 사유를. 내 글과 말이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1. showdown. 원래는 (포커에서) 가진 패를 모두 내보여 주기. 폭로, 공개, 공표라는 뜻. 이 땅에서는 고스톱을 칠 때 점수를 낼 만한 상황에 있는 상대방 두 사람에게 패를 보여 주고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강요하는 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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